제주도의 역사
개요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 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100년 제주의 역사
이후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제주의 옛명칭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이들 명칭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입니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三姓) 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삼성혈)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 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 명칭)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후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에는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 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시대별 제주역사
선사시대역사
먼저, 선사시대 역사를 알아봅니다. 제주도의 역사는 약 7만~8만 년 전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석기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주시 애월읍 음요리에 위치한 '빌레못굴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태석기 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순록과 황곰의 뼈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과 달리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지속설을 제주도가 지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유적지 중 하나인 한경면 고산리에 <선사유적지>가 있었으며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제주시 삼양동 선사유적과 제주도 개발신화의 중요한 장소인 <삼성혈> 도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는 예로부터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하였습니다. 중국, 일본, 동남아를 오가는 선박들의 중간 기항의 역할을 했습니다. 1928년 제주항 건설과정에서 오수 전, 화천 등 중국 한나라의 동전이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과거 제주도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잇는 무역로의 중간지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규슈로 가는 해상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탐라시대역사
탐라는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나라로 백제, 고구려, 신라와 교역하고 중국, 일본과 수교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나라입니다.
탐라는 고려 태조 때까지 군주와 세자의 통치를 받다가 신라의 영향을 받아 성주와 세자라는 칭호가 쓰였으나, 탐라를 달래고 통제하기 위해 무산계와 구당사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내정에 개입하였고, 무산계는 가문의 일부였고, 구당사는 지방의 통제를 담당하는 관청이었으나, 고려의 중심 행정력이 제주로 확산되면서 성주와 세자의 지위는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으로 개칭되어 그 중요성은 감소하였습니다.
탐라, 일본,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중요하여 장기간의 교류와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탐라는 여러 품목을 수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탐라방포(탐라에서 생산되는 마른 천의 일종)와 탐라복(배)이 있습니다. 백제와 함께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부흥운동에 기여했습니다.
탐라국 시대는 고려시대 중앙행정권에 의해 변화되어 이 시기에는 탐라와 그 주변 국가들과의 문화교류와 교역이 활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역사
고려시대 제주도의 역사는 여러 가지 변화와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제주도는 처음에 군으로 편성되었다가 의종 때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군으로 환원되습니다.
이때부터 제주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몽골 통치 시기에는 탐라 또는 탐라국으로 불리게 되었다가 충렬왕 20년에 다시 제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관리파견으로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주요 요인으로는 관리의 부패, 지방권력, 토지침범, 과세, 관리의 비중 등이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원종 11년 제주도에 처음 상륙했는데, 고려 조정은 김수장군과 고 여림장군을 통해 제주도를 지켰는데, 고려 조정은 지역 방위군의 협조와 지역 주민들의 삼별초 지원을 통하여 삼별초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승리한 삼별초는 조천포에 거점을 마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는데, 이는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와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종 12년에 김통정이 제주도에 와서 남해현을 점령하고 항파두리가 본거지로 선정되었는데, 이곳은 자연 방어가 가능한 지역이었고, 이후 삼별초등학교는 약 1년 동안 방어시설을 짓고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삼별초의 활동으로 인해 고려와 몽골이 혼란을 겪었고,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몰아내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원종 14년, 약 1만 2천 명의 고려와 몽골의 동맹에 의해 삼별초는 정복되었고, 삼별초의 평가 이후 약 100년 동안 제주도는 몽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역사
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으로 불리는 제주삼업이 세워졌고, 이에 따라 제주도에는 정 3품 목사와 종 5품 재판관이 파견되었고, 대정·양현에는 종 6품 재판관이 파견되어 관리 체계와 방어 체계를 갖추면서 제주도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제주도의 인구는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삼읍의 인구는 9,935 가구, 63,474명으로 급증하였고, 이에 정부는 실업자를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켜 인구 과밀화를 관리하고, 범죄자(특히 말)를 황해도와 평안도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약 150년이 지난 후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200년 동안 제주도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는데, 이는 피난민들이 굶주린 결과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까지 지속된 출국금지를 시행하는 유망한 금지 정책을 도입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제주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감옥으로 전락하였고, 주민들은 폐쇄적인 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제주도민들을 '두무악'이라고 부르는데, 제주도의 노예성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육지로 이주했지만 언어와 관습의 차이로 다른 지역 주민들로부터 고립되었고, 안보 문제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무예는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17세기 이후에는 병역에서 동등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제주도는 약 50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된 곳으로 광해군 등 왕실부터 승려, 도적 등 신분과 계급이 다양한데, 그 유형은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근현대사
고종대에 들어선 이후 제주도의 행정 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종 원년(1864) 대정현과 정의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17년(1880) 군으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정의현과 대정현의 두 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목과의 차이가 미미해져 제도가 혼란해지고 과거의 문제점이 다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895년 5월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전국을 23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그중 하나인 제주부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목·부·군·현 등의 모든 행정 구조와 관청 명칭이 폐지되고, 모든 지방 명칭이 군(郡)으로 통일되었는데, 이 변화에 따라 제주도도 역시 제주군·대정군·정의현으로 개편되었고, 목사와 두 현감도 군수로 변경되어 제주부 관찰사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때 제주도 법원도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23일제는 약 1년 뒤 폐지되고 13일제로 대체되었는데, 이 결정은 민생의 불편함과 관리의 번거로움, 재정적 부담 등을 고려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13도 중 하나인 제주도에 목사가 생겼다. 이는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제주는 섬이라 육지로의 운송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별한 복지혜택이 있어 대정과 정의 두 군을 통제할 수 있는 목이 설치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다시 1목 2군 즉 제주목, 대정군, 정의군으로 구성되어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으나, 대정 군과 정의군 두 군이 육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또한 목사와 군수를 주임으로 통일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목사와 군수가 인근 군수로 활동하도록 규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병휘 등 유능한 인물이 제주의 목사로 부임하여 주임 3등으로 승진하고, 법원 판사를 겸임하였으나, 1897년 11월 제주군이 설치되면서 1목 3군으로 변경되어 목사제가 폐지되고 제주도의 행정이 전라도관찰사로 이관되었습니다.
또한 1915년에는 제주도의 군제를 폐지하고 도사제를 도입하였으며, 도사는 경찰서장을 겸임하였으며, 1917년에는 환상도로가 개통되면서 행정의 중심이 해안마을로 옮겨졌습니다
제주의 역사적 인물
제주의 역사적 인물의 대표로 추사 김정희를 소개합니다. 김정희는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입니다. 실학자이자 서화가이기도 하죠.. 1786년(정조 10)에 태어나 1856년(철종 7)에 사망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청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진적을 함께 감상하고 경학 및 금석문과 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귀국했습니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시켰습니다. 문인화론을 바탕으로 뛰어난 시서화 작품을 다수 남겼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11년 동안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항몽의 역사와 항몽유적지
고려 시대 동안, 몽골의 침략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침략에 대응하여, 당시 최씨의 정부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저항했지만, 몽골의 압력으로 무인 정권은 붕괴되었고, 1270년에 개경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때, 삼별초는 대몽골 봉기를 이끌었고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삼별초는 처음에는 도둑을 단속하는 임무를 가지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되었지만, 후에 수도 방어, 경비, 특공대, 정찰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270년 정부가 개경으로 개종하자 야별초의 배중손과 지유 노영희가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에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승화는 왕을 만들고 삼별초는 진도로 건너가 장기 대몽골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진도는 초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초운을 막는 것은 개경 정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도는 일본과 중국의 교류에도 요충지였고, 농경지가 비옥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진도 주변에는 무인 병력이 지원할 수 있는 전남 지역이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진도를 기반으로 한 대몽골 봉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경상도 밀양 사람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남해안과 전라도 지역이 삼별초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군현에 삼별초를 수용하거나 진도로 옮겨 삼별초의 적을 알아본 경우도 있었고, 삼별초는 주현에게 진도로 들어가도록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라도 향토 사찰인 신사전은 삼별초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나주에서 개경으로 피신하였는데, 삼별초가 진도를 기반으로 한 이후 전라도의 세금 수송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여러 차례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으나 1271년 5월 진도에서 쫓겨나 제주도로 옮겼고, 제주도에 와서도 삼별초는 전라도 서남해안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운로를 봉쇄하고 개경정부를 해쳤다. 원종 13년(1271) 3월부터 5월까지 조운선 20척과 곡식 3천 석을 약탈하고, 원종 13년 8월 공미 800석을 약탈하였으나, 원종 13년 6월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하였다.
삼별초군과 직접 ·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유적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포구유적 : 조천포(朝天浦), 군항포(軍港浦), 도근포(都近浦, 朝貢浦, 外都浦), 애월포(涯月浦), 함덕포(咸德浦), 명월포(明月浦).
㉡성지유적 : 외성(토성), 항파두리성 내성(석성),보조성, 환해장성, 애월목성, 고성천, 사왕천.
㉢진지ㆍ망대유적 : 파군봉(바굼지오름), 극락봉, 안 오름, 망이리 동산, 진군(陣軍)을(陣軍岳), 살 맞은 돌.
㉣생활문화유적 : 성내 건물지(대궐터 외, 3개소), 기와가마터(성내, 성외), 백토 채취장(백토골), 구시물, 오(옹) 성물, 장수물, 유수암천, 장털(왓), 고분군, 종신당터(終身堂터), 태산사터(泰山寺터), 소금밭
전투유적지
삼별초군과 고려 정부군, 혹은 삼별초군과 여몽연합군이 서로 전투를 벌이거나 서로 상대방을 눈앞에 두고 대치하던 관련 유적지는 아래와 같이, 두 가지 부류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입도한 고려 정부군과 이문경 장군 휘하의 삼별초 선발대와의 전투지로서는 동제원과 손담천, 그리고 삼별초 본대와 여몽연합군의 전투지로서 함덕포, 파군봉, 항파두성 및 붉은 오름이다.
㉠삼별초 선발대와의 전투지 : 동제원, 상담천(松淡川)
㉡삼별초 본대와의 전투지 : 함덕포, 파군봉, 항파두리성(외성→내성), 붉은오름.
항일의 역사
어느 나라든 주권을 유지하거나 침략을 당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집단은 군과 경찰입니다. 1906년 1905 한일 조약에 성공한 일본 침략자들은 한국에 청장실을 설치하고 고종을 탄압했으며 1907년 한국군을 해산했습니다. 이에 홧김에 무장봉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한국인이 일으켰고 이것이 의병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1907년 가을 일본군 부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제주, 대정, 정의 삼군의 무기고를 점령하고 한국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군 장비를 파괴하고 무기를 소각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제주도민들은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1909년 2월부터 시작된 '기유항길의병(己酉抗日義兵)'을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주도에서 의병항쟁을 진압한 것이 일제 경찰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경찰제도와 경찰력을 강화하여 식민지 지배와 침략정책을 펼쳤고, 한국인을 탄압하고 통제했습니다. 이 강압적인 통치를 무단결석이라고도 합니다. 통감부는 1906년 광주경찰자문관으로 제주지청을 설치하고 이듬해 목포경찰서 제주지청을 설치하고 1908년 제주경찰서로 승격하는 등 무장경찰력을 강화했습니다.
이에 제주, 대정, 정의 3군의 군청은 상주 경찰력으로 30명 내외의 경찰관을 파견하였는데, 이들 경찰력은 일진회가 주재소에 추천한 제주 출신 경찰관들로 구성되어 민중에 대한 탄압과 반역행위를 자행하였는데, 1915년에는 일진회가 제주도를 겸임하도록 일본 경찰관을 임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울릉도와 본섬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이로 인해 본섬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하였고, 연원도는 침략이 가장 절실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1922년 제주경찰서 병력이 경찰대(일본인 1명)와 경찰대(일본인 3명, 조선인 1명)로 증원되었고, 1937년에는 제주경찰서와 경찰서의 위치가 발표되어 경찰력이 더욱 증강되었는데, 당시 경찰들은 종종 무단통치의 테러리스트로 여겨졌습니다.
제주도의 4.3 사건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중요하고도 뼈아픈 사건 중의 하나로 1947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극심한 폭력과 억압을 동반한 민중봉기와 함께 대량학살과 인권침해로 끝이 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시작된 4.3사건은 국민들의 불만과 민주적 요구로 인해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군사력에 의해 국민들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결과 많은 무력 충돌과 무자비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아래의 배너는 제주 4.3에 대해서 정말 잘 알기 쉬운 4.3평화공원 안내 싸이트입니다. 한번 보시면 4.3 사건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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